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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Social affairs
작성일2017-11-21 10:22:15
제목IMF 구제금융 신청 20년..40년 전 희망 그리운 60대 비정규직

'개발세대' 자화상 창원 노재우 씨
산업화·외환위기·비정규직 파고 넘어
"제조업에 과거같은 비전, 꿈 없다"


20년 전인 1997년 11월 21일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공식 결정한 날이다. 그해 12월 3일엔 IMF와 공식 협약을 맺었다. 이로써 한국의 경제주권이 IMF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외환위기는 서민들의 삶에 큰 상처를 남겼다. 대우그룹과 한보그룹, 삼미특수강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져 많은 실업자를 양산했고 정년이 보장되던 고용 안정은 사라진 옛말이 됐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대는 이제 예순 전후를 맞은 이른바 ‘개발세대’다. 경제활동이 한창이던 30~40대에 외환위기를 맞아 정리해고 1순위가 됐고 일부는 생존을 위협받아야 했다.


외환위기 파고를 넘은 뒤에는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과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충격을 거쳤다. 30년 전 삼미특수강에 취직한 뒤 이런 변화를 생산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은 노재우(65)씨를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를 들어봤다.


부도로 공장이 멈추던 날. 노재우 씨는 “인생에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삼미특수강에서 강판을 생산했다. 20년 전 날짜를 또렷이 기억한다. “1997년 3월 19일. 오전반으로 출근했는데 8시30분쯤 ‘삼미 부도났다’는 외침이 들리더군요.”


오전 10시, 작업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동료들과 일손을 놓고 멍하게 서 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막해서 눈물이 났어요. 농사꾼이 농사를 망치면 밭을 엎고 이듬해 다시 지으면 되는데, 회사가 멈추니 농토가 사라진 듯 눈앞이 캄캄했으니까….” 가장에게 외환위기는 곧 절망이었다.


━ 산업화 속 싹 튼 '개발세대'의 희망

1980년대 삼미특수강 노조간부들이 찍은 단체 사진. [사진 노재우씨 제공]

노씨는 77년 한국종합특수강에 생산직으로 취직했다. 17세 때 이불 보따리를 매고 노선 버스로 도시에 온 지 10년 만이다. 어릴 적 경남 산청에서 중학교를 우등 졸업했지만 진학할 형편이 못 됐다. 장학금을 받아도 교통비, 하숙비를 해결할 길이 전무했다. 고교 원서용 사진을 몰래 찍어놓고 접수 마감날 울었다. 장돌뱅이 친척을 따라 전국을 헤매길 일 년 반, 우연히 경남 마산 창신공고에 진학할 기회가 왔다. 낮에는 화원에서 일하고 밤에 수업을 듣는 조건이었다.

“그땐 야간을 2부라고 불렀습니다. 1부(주간) 학생들과는 동기라 해도 서로 모르죠.” 주경야독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고교 졸업장을 얻었지만, 앞날이 밝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 스물여섯에 처음 작업복을 입었다. 광공업과 제조업이 10년간 연 18~20%씩 성장하던 시대다.


그해 12월 한국종합특수강은 3대 생산품인 강판(steel plate, 鋼板)ㆍ강관(steel pipe, 鋼管)ㆍ봉강(bar steel, 棒鋼)을 동시에 생산하는 창원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 스테인리스 강판 공장을 울산에 세운 지 6년 뒤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을 양성하겠다며 국내 스테인리스 사업 독과점 권한을 줬습니다. 품질이 낮아 채산성이 떨어졌지만 독점 사업이라 이익을 낼 수 있었죠.”


쇠를 다루는 일은 고됐다. 기계에서 나오는 3m짜리 철판을 2인 1조로 반복해 들어 날랐다. 야간조 땐 죽을 맛이었지만 하루 8시간 3교대 작업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2교대 근무를 배정받으면 12시간을 꼬박 기계처럼 굴렀다.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한두 시간씩 초과근무를 하기도 했다.


일 년에 단 두 번, 설과 추석을 빼고는 휴일이 없었다. 공장에 변변한 샤워장이나 탈의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땀에 절은 몸을 기계에서 나온 냉각수로 씻고 나왔습니다. 물 온도가 뜨뜻하고,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40년 전 일이 아직도 머쓱한지 노씨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 호황 누리며 '잘 살 수 있다' 성공 꿈꿨지만…

1989년 10월 당시 노조사무국장이던 노재우씨(오른쪽)가 박광보 삼미특수강 사장 등과 연축압연공장 신설 준공기념식에 전시된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노재우씨 제공]

그래도 진창 속에서 희망이 자라던 시대였다. 월급(6만~7만원)이 당시 9급 공무원 격인 면 서기보다 높았다. 농협이나 말단 공무원을 그만두고 공장에 재취업한 사례도 있었다. 현재까지 강관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씨의 고향 후배 양재인(55)씨는 “그 때는 변변치 못한 사무직에 있다가 현장직으로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회상했다.

특수강 사업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80년대 고도성장을 이뤘다. 1억불 수출(80년)을 달성하고 82년 삼미종합특수강으로 사명을 바꾼 뒤 독일, 캐나다,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창원 특수강 공장에서 사회인 야구를 하던 투수 감사용이 삼미슈퍼스타즈에 발탁돼 활약한 것도 이 시기(82~86년)다. 노조가 생겨 갈등을 빚었지만 수확이 있었다. 근무 환경이 점차 개선됐다.

1989년 삼미특수강은 연속압연 공장을 새로 짓고 성대한 기념 행사를 열었다. 노 씨는 "무리하게 공장을 지은 게 훗날 부도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 회상했다. [사진 노재우씨 제공]

노씨와 양씨는 생애 최고 호황기로 91~92년을 꼽았다. 넘치는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 91년 특수강 강봉 제2공장이 들어섰다. 근로자들은 갖은 명목의 보너스를 1년 내내 지급받았다. “그 때는 회사만 가면 돈을 줬습니다. 경기가 워낙 좋아서 재고를 창고에 쌓기가 무섭게 중국 등지로 물건이 팔려나갔죠.”

노씨는 “나중에 정산해보니 한 해 성과급 지급 비율이 1000%나 됐다”고 했다. 아내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풍습이 처음 유행할 정도였다. “돈이 넘쳐나니 집에 넉넉히 갖다주고도 남는 게 있었던 거죠.” 기본급이 연평균 7%씩 오르던 시절이었다.

━ 외환위기로 나락에 떨어진 삶

김현배 삼미그룹 회장이 1997년 3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주력기업인 삼미특수강등 계열사에 대해 법정관리 신청을 낸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따. [사진 중앙포토]

하지만 호시절은 외환위기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삼미특수강은 부도 직전인 97년 2월 강관과 봉강 제조부문을 포스코에 매각(현 세아창원특수강)했다. 철강처럼 단단할 줄 알았던 정년 보장이 용광로에 쇠 녹듯 맥없이 허물어졌다.

포스코가 단행한 구조조정 칼바람은 300명 가량의 해고자를 양산했다. 새 주인을 만난 쪽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강관·봉강 공장은 20여일만에 가동이 재개돼 양씨 등 남은 근로자들이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반면 삼미가 끝까지 팔지 않고 버텼던 강판 생산부문은 이후 4년간 법정관리를 받았다. 2000년 현대자동차그룹(인천제철, 현 현대BNG스틸)에 인수되기까지 노씨를 비롯한 직원들이 기약없는 생활고에 내몰렸다. “내가 자의적으로 그만두거나 강제로 짤리지 않으면 정년퇴직까지 다닐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거죠.” 4000여명이 순식간에 실업자로 쏟아져 나왔다. 마산 시내 인력시장은 매일 새벽 북새통을 이뤘다.

막노동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 셋이 한참 돈 들어갈 고2, 중3, 중1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아내는 일찌감치 식당엘 다녔다. 남편이 실직한 뒤 밤마다 화장실에선 숨죽여 우는 소리가 났다. 노씨는 “뻥튀기나 과일장수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재주나 인맥이 필요했다”고 했다.

백수 생활을 20일쯤 견뎠을 때 지인 한 명이 구미 아파트 건설현장 동행을 제안했다. 창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나가 일당 6만원씩을 벌었다. “인부들 숙소가 부족해 컨테이너 박스 하나에 6~7명씩 쪽잠을 잤습니다 군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죠.”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이전, 공사장에서 1㎞ 떨어진 공중전화 한 통이 통신수단의 전부였다. 저녁 때면 지친 어깨들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전화부스 앞에 수십미터씩 줄을 섰다.

━ 안정된 일상으로의 복귀, 하지만…

삼미특수강이 현대차그룹(인천제철)에 인수된 뒤 임직원들은 4년만에 안정을 찾았다. 당시 노조위원장이던 노씨는 "재기를 위해 노사가 그 때 처럼 힘을 모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진 노재우씨 제공]

불행 중 다행으로 노씨의 힘든 생활은 길지 않았다. 열흘 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4월 26일을 기점으로 간헐적이나마 공장이 가동됐다. 97년 12월 정리절차가 개시되면서 월급이 서너달씩 밀리곤 했지만 5년 뒤 회사는 재기에 성공했다. 현대차그룹에 편입돼 2003년 유상증자가 이뤄지면서 직원들에게도 다시 안정이 찾아왔다.

2009년 노씨는 정년(56세)을 채우고 퇴직했다. 삼미 입사동기 중 정년퇴직자 비율을 묻자 “30~40%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15년 포스코에서 세아그룹으로 편입된 세아창원특수강에는 이보다 적은 10%정도가 정년을 채운다. 4년 전 임금피크제 도입과 함께 정년이 연장(61세)돼 후배 양씨는 5년을 더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다. "명이 질긴 거죠." 회사 대주주가 두 번 바뀐 세월을 견디며 젊음이 초로(初老)가 됐다.

삼미그룹이 2003년 새로 건립한 특수강 종합 가공센터 공장 내부 설비. [사진 중앙포토]

외환위기는 제조업 현장에 비정규직을 등장시켰다. “IMF가 오면서 협력사라는 게 처음 나왔습니다. 정년이 끝나면 집에서 쉬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젠 퇴직하고도 비정규직으로 협력사에 재취업해 또 일을 하는 거죠.”

노씨는 “원청 회사는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70% 수준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최저임금이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작업형태나 강도에 따라 비정규직 내에서도 받는 돈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지난 13일 노씨가 입은 작업복 왼쪽 가슴엔 ‘성일로지스주식회사’가 박혀 있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호이스트 크레인을 조종해 5톤짜리 스테인리스 강판 완제품을 출하용 트럭에 싣는 일을 한다. 월급은 150만원 남짓이다. 정규직 시절의 40% 수준이지만 노씨는 “돈이 필요해서 나왔다”고 했다.

“퇴직 후 실업급여를 8달간 월 120만원씩 받았는데 그게 끊기니 경조사비 내기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경제활동을 안 해도 돈 나갈 일은 그대로니까요.” 1년 반을 쉬면서 다른 일자리도 알아봤다. 대부분이 60세 미만 나이 제한에 걸렸고 아파트 경비 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루는 마늘밭 아르바이트를 나가 외환위기 때처럼 일당도 받았다. “7만원을 받는데 만 원을 모집책이 가져갑니다.” 수중에 떨어지는 하루 품삯이 20년 전과 같았다. 건설현장서 받던 6만원 그대로였다.

━ 비정규직·제조업 그리고 젊음의 위기

개발세대 노재우씨가 지난 13일 경남 창원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노 씨는 56세 때 정년 퇴임한 뒤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했다. 송봉근 기자

올해는 노씨가 처음 공장에 발을 들인 지 40년 되는 해다. 여태 돈벌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편으론 아직 돈을 벌기에 운이 좋다. “지금 저같은 퇴직자들이 협력업체 비정규직으로 들어오려고 줄을 서 있습니다.”

자식 셋은 모두 대학을 나와 지방 공무원이 됐다. “평생을 제조업에서 일해보니 너무 힘들어서, 애들은 나보다 낫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권했다”는 노씨다. 그래도 자식 걱정이 남았다. 지난해 막내아들이 결혼을 했다. “제가 내집 마련을 하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내가 안 해주면 평생을 벌어도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외환위기 때보다 가계가 오히려 더 팍팍해졌다.

옛 노조위원장 출신인 노 씨는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 현장의 3분의 1이.비정규직이 됐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박경서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20년 전 기업이 부채 문제를 겪었다면 지금은 국가와 민간이 부채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민간 경기 활성화를 위해 가계가 돈을 꾸어 집을 사게 했고 그 힘으로 부동산 건설 경기를 부양했지만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됐다”는 설명이다.



출처: 심새롬 기자, 중앙일보